마왕과 용사의 행방불명 " ...다시 말해봐." 목소리가 파들파들 떨리는게 느껴진다. 평소 같으면 마왕의 위신이 어쩌고 카리스마가 저쩌고 할 앞의 인물이 잠시 아무 말도 안 하는게, 더더욱 불길하다. 설마 거짓말이겠지. 내가 아무리 불 운의 별 아래서 태어났다지만, 그렇게 재수가 없는 놈일라고. 그러니까 말해봐, 응? 거짓말이 지? 그렇지? 그렇다고 말해줘~! 나는 위와 같은 간절한 마음을 눈에 가득 담은 채 내 앞에 선 아름다운 얼굴을 응시했다. 윤기있 게 흘러내리는 은보라의 머리칼은 그저 아무렇게나 헤쳐놓았음에도 찬연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 고, 상아로 빚은 듯한 단아한 이목구비는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완벽했다. 아름다움의 대명사 라 일컬어지는 마족들 중에서도 그의 미모는 발군의 것인지라, 그가 다니는 어귀에서는 언제나 감탄사가 따라다녔다. 지금도 어디선가 한숨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나 나는 지금 다른 일에 눈이 뒤집혀 그의 미모도, 누군가가 행한 무례역시도 모조리 무시하 고 있었다. 게다가 매일 보는 얼굴이라 그 아름다움에 면역이 되기도 했고. 한숨에 대한 것은- 다른 때 같으면 감히 주인 앞에서 한숨을 쉬다니- 라며 갖가지 고문으로 그 죄를 단죄했을 터이 나, 지금은 좀 더 급한 일이 있다. 누군지 모르지만 너 오늘 운 좋은줄 알아라. 나는 그의 입이 열리기를 간절히 기도했고, 내 기도 가 하늘에 닿았던지 그가 결국에는 입을 열었다. " 앞으로 일주일 후면 용사가 이곳에 도착하여 폐하께 대결을 신청한다 하옵니다. 선왕폐하께서 급작스레 돌아가시어 계승의식을 제대로 못했다는 사실이 바깥으로 샌 것 같습니다." " 그거 , 정말 확실한거냐? 누가 알려주더냐? 또 어디서 이상야릇한 소문 듣고 와서 이러는거 아 냐?" 제발이니 저잣거리 놀러다니다 들은 이야기라 해다오. 만일 그렇다면 내 네가 그동안 일 안하고 탱자탱자 놀러다닌거랑 내 간식을 몰래 훔쳐먹은거랑 그 외 등등의 것들, 모두 용서해 주마. 그 러니 제발! 정말이지 이렇게 하늘에 무언가를 빌어보기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빼놓고는 처음 이다. 기본적으로 나는 기도나 기원같은거랑은 영 젬병이라구. ( 뭐, 마왕이니 당연하려나마는) 그러나 나의 이 평소 불경함을 알았던지, 마신께서는 나를 단호히 내쳐버리셨다. 왠지 모르게 불 그죽죽한 얼굴로, 나의 부하 1호이자 오른팔이며 한때는 나의 유모였고 지금은 마왕의 스승이 며, 마왕성의 집사역할까지 맡고 있는 지스카스가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 .... 어제 우연하게 눈이 맞은 천족에게 또 다른 천국을 보여주고 얻은 정보입니다. 고로 확실 할 겁니다. 후후훗." 그럼 그렇지. 그의 말이 끝나자 갑자기 회장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으엑, 부럽다. 아니 또? 지스카스님 저를 버리시는 거예요? 등등..... 주로 그의 사생활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주를 이룬다. 과연 유혹의 악마라고 해야할까. 전번에는 엘프, 전전번엔 요정, 그 전 에는 님프, 그 전에는 인어등등..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엽색행각을 벌이는 그의 행위에는 이제 익숙해져 있었지만. 젠장, 천족? 대체 저 놈이 안 건드린 종족이 있기나 한지 심히 궁금해 지기 시작했다. 아니,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게 아니잖아!!! 나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를 내려다 보며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저기, 지스 .천족은, 원래 거짓말을 못한다고 했었지?" "네, 그렇습니다. 그들의 천성에 위배되는 짓이라 그들은 언제나 진실만을 말해야 한답니다. 배 운 것은 확실하게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폐하의 명민함은 날이가고 달이 갈수록 빛이 나시는군 요. 이 미천한 것은 기쁘기 그지 없습니다. 이대로 나가신다면 언젠가는..." 내가 오랜만에 제대로 맞추어서 기뻤는지 지스의 얼굴이 환히 빛나며 나에 대한 찬양구를 이어 나가지 전에, 나는 얼른 그의 말을 잘라버렸다. " 잠깐, 지스. 내 말좀 들어봐. 그럼 진짜 일주일 후에 용사가 오는거네? 그들은 절대 거짓말을 못하니까." 말이 끊겨서 기분이 나빴는지 보랏빛의 눈동자가 설핏 불쾌함을 담았으나, 그는 이내 그것을 지 워버린다. 불쾌함의 대상인 내가 너무나 불쌍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차마 화내기가 그럴 것이 다. 실제로, 나는 지금 기분이 매우 저조해지고 있었다. " 네, 그렇습니다." ".... 마왕하고 싸우려 온다 이거지?" " 마왕성에 오는 이유가 또 달리 있을까요?" 태연하게 대답하고 해죽대며 웃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등줄기가 근질근질 한 것이, 내 가 그동안 그렇게 그에게 못되게 굴었나싶다. 내가 그렇게 부족한 왕이었던가- 라고 자문해보 니, 왠지 예라는 대답이 나오기는 한다. 왕 이면서, 신민의 최 하급 마족만큼의 마력도 없는 허울 좋은 왕이긴 하지. 하지만 말이다. 자기네 왕이, 자기가 끝끝내 세운 자신의 군주가 죽을 지경에 처했는데도 불구하고 저 여유 만만한 모습이라니! 나는 풀이 죽었다. 하긴, 자기 수명이 이제 일 주일 남았다는데 나정도의 반응이야 약과지. " ....그럼, 나 이제 일주일 밖에 못사는 거야?" " 네, 그렇습니..........가 아니라!!! ...폐하, 방금 뭐라 하셨습니까아?" 왠지 당황하는 듯한 그의 모습이 흐릿해진다. 눈앞이 뿌연 것이, 아무래도 나 또 우는가 보다. 우 씨.. 그래, 나 지금 진짜 서럽다구! 으허헝...정말이지 이렇게 재수가 없을수가 있다니! 너무하잖 아! 나는 서럽게 훌쩍이며 신세한탄을 하기 시작했다. " 엉... 훌쩍, 흑.. 아버지가 예기치 못하게 불귀의 객이 되어서 계승식도 제대로 못한 마왕이..흑 흑.. 대체 어떻게 용사하고 싸워? 나는 겨우 그저께가 되어서야 진명을 받았다고! 용사와 맞서 싸울 마력같은게 있을 턱이 없잖아... 엉엉엉..." 그랬다. 마왕들의 평균수명 1만년은커녕 천년만에 마신께로 불려간 아버지 때문에, 나는 준비 없이 마왕직에 올라야 했다. 보통 죽기 직전에서야 마왕의 마력과 지식을 후계자에게 전이한다. 그런데 아버지는 마력은커녕 지식 한조각 주지 않고 떠나버린 것이다. 힘 없는 마왕은 정말이지 꼴불견이다. 정말 다른 선택이 있었다면 나는 이런 자리 줘도 안받았을 거다. 뭐가 마왕이고 뭐 가 전통이냐!!! 빌어먹을, 왜 마왕직은 피로 이어져야 하냐구! 그냥 능력 좋은 마족이 올라가는 자리면 얼마나 좋아.. 나는 필사적으로 마왕직에서 벗어나려고 했으나 아무리 도망가도 나를 따 라붙는 신하들 때문에 결국 울며 겨자먹기로 보위에 올라야 했다. 다른 모든 일들은 일사 천리로 이루어졌다. 그중 가장 시간이 걸린 것은 이름의 계승이었다. 갑 작스런 아버지의 승하로 나는 제대로 된 이름도 못받았기에- 그때까지도 나는 아명으로 불리고 있었던 것이다- 신전에 갖은 치성을 드리며 이름을 달라 한 결과, 각인(刻印)의 마왕이란 이름 까지는 받을 수 있었다 . 마왕치고는 약간 기이한 이름이긴 했지만 뭐 어떠랴. 파괴나 암흑이나 혈향이나 혈해의 마왕보다야 우아하고 지적인, 고상한 이름 아닌가.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 했다. 마력이나 지식같은 것은 1만년의 시간동안 천천히 쌓아가면 되는 것이다. 대대로 전해지는 마력 과 지식의 근원을 잃은 것이 아쉽기는 했으나,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그 모든 것을 되 찾을 날 이 있겠지. 어찌 되었든, 나는 고대 마왕의 핏줄을 이어 받은 적통(嫡統)이니 말이다. 피의 기억 을 깨우칠수만 있다면, 그 따위 것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 지스카스가 말해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 따위가..훌쩍, 무슨 상관이람? 다 죽게 생겼는걸.. 흑흑..그런거..흑, 깨우칠 시간 있 으면 도망가고 싶다고!! 엉엉, 정말이지 이 자리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어떻게 된게 마왕 의 절대필수강제 의무가 '용사가 찾아 왔을 시에는 꼭 대적해 줄 것.' 이냐고?!!! 덕분에 나는 여 기 앉아서 꼼짝 없이 죽을 날만 기다려야 하잖아. 이게 뭐야, 이게 뭐야...허어엉....아버지, 왜 나 만 두고 갔어요.." 정말이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애통하고 분해서 훌쩍이던 울음소리가 통곡으로 바뀌었다. 그런 나를 보던 지스카스 이하 모든 신하들이 안절부절하며 나를 달래려 애를 썼지만, 한번 나온 울음 은 도무지 그칠 기미가 없다. 나를 이꼴로 만들어 놓은 소식을 가지고 온 지스카스는 황망히 옥 좌 곁으로 뛰어올라( 무엄하게도!) 향수내가 가득 담긴 손수건으로 내 얼굴을 닦아주기 시작했 다. 그 지독한 향기에 내가 코를 찡긋거리자 그는 헛웃음을 지으며 손수건을 던져버렸다. 그리 고 곧이어 그는 아직까지도 훌쩍이는 나를 부드럽게 안아주고는 토닥이며 괜찮다고 달래주었 다. 마왕이 된 이후 이제 다 컸다며 잘 해주지 않던 토닥임을 받고 있으려니 눈물이 멈추고 마음 이 안정되기 시작한다. 웃음기와 부드러움이 적절히 섞인 음성이 귓가에서 소곤거리는데, 그 소 리가 마치 자장가처럼 안락하기 그지 없다. " ..자자, 폐하. 울지 마세요. 마신께 제 이름을 걸고 맹세하건대, 절대 폐하께서 돌아가시거나 당신의 몸에 있는 터럭 하나 다치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제 16차 천-마대전 이후 생긴 조약에 의해 생긴 규약을 잊어버리신 것 같으니 다시 말씀드리지요. 폐하께서는, 결혼 하셔서 후대를 낳 으실 때까지는 절대적으로 보호받으실 권리가 있으시답니다. 당시의 마왕이셨던 학살의 마왕과 천족들의 왕 자애의 천왕사이에 있었던 밀약에 따르면- ...폐하? 듣고 계십니까?" 리드미컬하게 토닥이는 손길과 말을 할때마다 살갖으로 전달되는 간지러운 진동. 소곤소곤 울려 퍼지는 부드러운 미성에 나는 이미 수마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었다. 보통때는 그렇게 쉽사리 잠 들지는 않는데, 한참 울고 나니 힘이 빠졌었나보다. 나는 자그맣게 졸려.. 라고 하고는 나를 안 은 지스의 품으로 파고들어갔고, 그런 나를 보며 지스는 한숨을 쉬더니, 그럼 주무십시오- 라고 하고는 나를 들고 침실로 워프해서 나를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다음 회의 안건은 이제 그가 진 행해나가겠군, 이라고 나는 무의식중에도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고는 가려는 지스의 옷자락을 비몽사몽간에 붙잡고, 굿나잇 키스는? 이라고 물으니 이마위 에 따뜻한 체온이 잠시 머물렀다 사라진다. 나는 해죽- 웃으며 그의 옷자락을 놓고는 본격적으 로 잠의 바다를 헤엄치기 시작했다. 잠의 해변가에서, 문득 지스가 '우리 대책없이 귀여운 폐하, 그럼 안녕히 주무십시오..'라고 하는 말을 들은 듯도 했지만, 착각이려니- 하고는 바다의 중앙으 로 헤엄쳐들어갔다. 나른함이 온몸을 휘감아 들었다. ***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내가 잠들 무렵이면 항시 바쁜와중에도 찾아와서 머리를 쓰다듬으 며 자장가를 불러주던 나의 아버지.. 다른 이들에게는 잔혹하기 그지 없는 분이었으나, 언제나 내게만은 웃음을 보여주고는 하셨었다. 그 날 역시 여느때와 같은 날이었다. 다만 다른 것은, 언 제나 아버지를 기다리다 지쳐 잠에 빠지던 내가 말짱한 정신으로 그의 자장가를 듣고 있었을 뿐. 눈을 감아 더 가까이서 그의 숨결이 들려오는데, 문득 나를 쓰다듬는 손끝에서 갈무리되지 못한 생각들이 흘러들어왔다. -카이, 우리 귀여운 카이...- 아빠... -대체 신은 내 귀여운 아들에게 어떤 운명을 점지해 놓으신 걸까..? 천신과 마신의 별이 겹치는 날에 태어나다니.. 너의 천궁도는 너무나도 복잡해서 이 나조차 제대로 해석할 수 없구나. 다만 한가지 확실한건, 내가 죽은 이후 천궁의 태양이 네 운명에 강하게 간섭할 것이란 것. 네가 다 클 때까지만이라도 힘의 주인을 속일 수 있으면 좋으련만.. - 아빠..그게 뭐죠? 나는 불행의 별 아래에서 태어나 이곳, 마왕궁을 벗어나면 안되는게 아니었나 요? 천신과 마신의 별이란 또 뭐지요... 아빠... 왜 그리 슬퍼하시는 건가요? -우리 카이.. 아빠가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아빠..? -분명 울테지? 하지만 , 어쩔까.. 이미 운명은 정해져 버린 것을.. 미안구나. 이렇게 가버리는 네 아비를 용서해다오- 목소리가 멀어진다. 그래.. 이건,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바로 전날에 있었던 일이었다. 기억났 어... 왜 지금까지 나는 이걸 잊고 있었을까? 자리에서 일어서 아버지를 잡고 싶었으나 가위에 눌린 것 마냥 몸의 어느 한구석, 내 마음대로 되는 곳이 없다. 나는 미친 듯이 떠나는 그를 부른 다. 안돼요 , 가지 말아요! 아빠, 아빠!!!!! 아빠아아아--!!!!!!!! -콰쾅!!!- "으응..." -쿵- " 아우, 씨..." -콰콰콰콰쾅- " 아우우..우웅.. 시끄러..좀 조용히좀." -쿵쾅쿵쾅 콰쾅콰쾅 콰다라라랑!- "... 아 증말!!! 어떤 새끼..아니 놈이야!!!" 한참 잠을 자다 시끄러운 소리 때문이 잠이 완전히 깨버려서 욕설을 내뱉다가 얼른 말을 고쳤 다. 축하해 지스, 당신의 예절교육은 무의식중에서도 발휘되고 있어. 나는 웃기지도 않은 말들 을 중얼거리며 슬금슬금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아직 잠에서 덜 깨 멍했기에, 침대 모서리에 앉 아 나는 머리를 흔들거렸다. 무슨 꿈을 꾼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난다. 원래 꿈이란 그런거라지 만, 굉장히.. 그리운 꿈이었는데.. 잠시 꿈을 생각하다가, 머리가 아파와서 끄응, 하고는 신음을 내뱉었다. 잠에서 덜깬 머릿속과 저 기괴한 음향이 뒤죽박죽 되어서 정신을 차리기 힘들다. 아까 지스카스 품에서 잠이 든 것까지는 기억한다. 그러나 그 전의 기억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내 잠을 깨운 저 이상한 굉음이 나는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 대체 저 소린 뭐야? 꼭 뭐가 부서지는 소리 같네..게다가 점점 크기도 커지고. " 처음에는 멀리서 들려오던 그 소리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이곳으로 가까워지는 듯 했다. 악사단 인가? 그렇기엔 리듬감이 좀 없고. 내가 자는동안 성 내부를 공사하고 있는 건가? 그런 소린 들 은적 없는데. 대체 저건 뭐지. 나는 곰곰이 저게 무슨 일일지를 앉아서 생각하고 있었다. 머리가 완전히 깨어나지 않아서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도 후회하는 일로, 그때 당시 나는 그렇게 앉아 있지 말고 어디 구석으로 가서 숨어 있어야 했다. 만일 그랬다면 몇분 후 조우할 나의 지랄(..미 안 , 지스. 하지만 정말 당신도 이점에는 동의할거라 생각해)같은 운명과 마주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그 멍청한 짓거리는, 내 방의 문이 갑작스레 벌컥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올 때까지 계속되었고, 그 시점에서 나의 운명은 이미 쫑이었다. 나는 멍하게 열린문과, 그 문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오는 난입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우와- 하 고 입을 벌렸다. 이 자, 정말이지 굉장하다! 멋져! 게다가, 이쁘다!! 대체 무슨 똥배짱으로 그랬는 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한동안 아무말 안하고 생글거리며 그의 외모를 관찰했다. 한낮의 태양빛 을 그대로 담은 듯한 꿀빛금발은 부드럽게 웨이브치며 어깨 가에서 넘실댔다. 응시하는 것만으 로도 서늘해지는 시원한 푸른빛의 눈동자는 숱이 많은 속눈썹 사이에서 극적인 효과를 내며 빛 나고 있었고, 상하좌우 완벽하게 그려진 얼굴선은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얼핏 보면 중성적인 느 낌을 진하게 내는 지스와는 또 다른 매력이었다. 내 눈앞의 이는 그렇게 아름다우면서도 확실하 게 남자라는 사실을 어필하고 있었다. 섬세하게 빚어진듯한 지스와는 달리 그는 활달한 필치와 경쾌함이 넘치는 그림 같았다. 얼핏 보 기에도 탄탄해 보이는 저 몸도 굉장히 짜임새 있게 구성되어 있었고, 온 몸에서 흘러넘치는 영기 는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은빛이었다. 나는 이 아름다운 사내가 마음에 들었다. 뭐든간에 이쁘면 일단 용서가 되는 법이라고 배웠기에 (실제로도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이 남자가 허락 없이 이 방에 뛰어든 걸 용서해 주기로 했다. 나는 배시시 웃으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왠지 이 남자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행한 행동이었 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정말 이 눈앞의 인물이 누구인지 몰랐다. 그 극적인 미모에 홀려도 단 단히 홀렸었던 것이다. " 당신, 누구지?" 내 물음에,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 엘리듀크 테이레스만 쟈크레미 위슈델란 . " 굉장히 긴 이름이다. 내 이름보다야 안 길지만, 4조합 이름이라..나는 생긋 웃었다. " 엘리듀크 테이레스만 쟈크레미 위슈델란? 좋은 이름이네.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에 게 어울리는 이름같아. " "..그런가? " 내 대답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는지 그의 오라가 기분좋은 핑크빛으로 바뀌었다. 얼굴은 별 변화 없는데 그러는걸 보니 굉장히 귀여운 면이 있는 사내라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환하게 웃어주었 다. 호감이 드는 상대에게만 웃는것이라고 지스가 그랬으니까 웃어주는거야. 고맙게 알라구. 내 가 그렇게 웃자, 그는 한동안 그 새파란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는데, 왠지 시선에서.. 집요한 무언 가가 느껴진다. 그 이상한 기운에 내가 약간 기분이 불편한 표정을 짓자 슬그머니 얼굴을 풀고 는 멋쩍은 자세로 내 주위를 휘휘 돌며 방안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상하군, 이곳이 아닌가? 하지만 여기가 성의 중앙부위인데. 혹시 다른 곳인가.. 하지만 이 지 나치게 화려한 곳을 미친 듯이 지켜내려던 그 마물들은 뭐라 설명해야 하나? 이상한데... 라고 중얼대는 그의 목소리가 점점 신경이 쓰여와서, 나는 결국 그에게 무엇을 찾고 있느냐고 묻고 말 았다. ( 실은 그 말을 하는 와중에도 흘끔 흘끔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무래도 무슨 말을 하지 않 으면 저자의 기분이 상할 것 같다는 느낌이 강렬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 " 뭐, 찾는게 있어?" 내가 넌지시 건너 묻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그래. 나는 이 성의 주인을 찾고 있다. 마왕이라는 자지. 혹시 알고 있나?" ...엥, 나? 나를 왜 찾는건데? 내가 아는 사람인건가? 하지만 저런 외모를 지닌 자를 내가 잊어먹 을 리 없는데.. 내 표정이 기묘하게 변하자 , 그의 얼굴이 약간 굳었다. " 그런데, 너는 이곳으로 납치된 자인가? 혹 그러하다면, 내가 널 데리고 나가주마. 책임지고 가 족을 찾아주겠다. 그러니 겁먹을 것 없다. " 그러면서 내게 성큼 다가와 어깨에 가만히 손을 대며 무릎을 꿇고 나와 시선을 맞추는데, 차마 그런게 아니라는 말을 하기가 힘들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 싱긋- 하고 웃으며 빛을 뿌려대는데에는 도무지 견딜 재간이 없다. 결국 내가 우물쭈물하며 그의 시선을 피해버리 자, 피식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공중위로 떠올랐다. 그가 나를 덥석 안아올린 것이다. 그렇게 나 를 자기의 왼쪽 팔꿈치 위에 안아 올리더니만 이내 밖으로 걸어가기 시작한다. 자, 잠깐. 이건 또 뭐냐? 내가 뜨악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자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하기를, " ..겁먹을 것 없다. 내가 이곳에서 데리고 나가 줄테니. 그러니 나와 함께 가자. 마왕이 무슨 생 각으로 널 잡아온건지 짐작이 가는 이상 그대로 놔둘수야 없는 일. 원래 세상이란 먼저 행동해 서 쟁취하는 자가 승리하는 거다. 거기다 내가 있으니, 마왕은 무서워 할 필요없어. 자기 몸이 다 칠까봐 수하들만 주구장창 내놓는 그런 비열한 마왕은 한합 만으로도 충분히 물리칠 자신이 있 으니 말이다.... 그런데, 네 이름은 무엇이지? " ...란다.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가끔 아주 열이 받을 때마다, 이리저리 튀어오르는 생각들을 진정하 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을 한 결과 이루어낸 쾌거다. 예전엔 눈에 뵈는게 없는 미친 놈마냥 날뛰 었었는데, 그런 나를 보다 못한 지스가 매일같이 잔소리를 해 대서 결국엔 고칠 수 밖에 없었지. 자, 생각해보자구. 내가 이상황에서 가장 화가 나야 하는 사항이 어떤거지? 동의도 없이 덥석 안 아들고 가는 이 무도한 행동이냐, 아니면 비열한 마왕이라는, 내 존재에 대한 모독이냐? ...당연히, 후자의 것에 더 열이 받아야하잖아! 뭐, 비열한 마왕? 수하들만 주구장창 내놔?! 이봐 너, 사람이 없다고 그렇게 험한 말 하는거 아니 지! 이쁘다 이쁘다 해서 봐주는 것도 정도가 있다구! 내가 화난 얼굴로 바둥대며 그의 품에서 빠 져나가려 하자, 나를 잡는 그의 손길이 더 거세진다. 자자, 떨어지니까 조심해야지.. 그런데 너 의 이름이 뭐지? 라고 다시끔 묻는 그의 얼굴이 이제는 밉살스럽게 보인다. 보기 드물게 아름다 워서 마음에 들었는데, 성격이 저모양이라니. 아아 실망이야! 거기다 눈치도 없는 놈은 최악이라 굿! 나는 화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쏘아붙였다. " 카이드란 아슈렐 데 룬 제느기니아 이스텔라 아베크 젠 스위르델 . 진명은 각인(刻印)의 마왕. 이제 알겠냐 이 바보놈아? 니가 찾던 그 마왕이란 말이다! 비열이 뭐 어쩌고 어째? 당장 나를 내 려놓아라! 이 무엄한 놈 같으니! " "...뭐?" 그의 눈동자가 멍해지는 것을 보며 나는 오만한 눈초리를 그를 쏘아보며, 이제보니 바보에다 귀 까지 멀었나 보군? 하며 이죽댔다. 그러나 그는 전혀 화내는 기색이 없이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 너...정말, 마왕이냐?" 아니 이게 속고만 살았나? 나는 짜증나는 표정으로 그를 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 정말, 각인(刻印)의 마왕?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괴팍한 성격에 안하무인의 예절감각을 지닌 멍청하기 그지없고 과연 마왕의 피를 이어받았나 싶을 정도의 귀엽지 않은 외모라고..." ..메라? " 그거 어떤 놈이냐?! 누가 그래! 외모나 성격에 대해서는 할말 없지만 안하무인의 예절 감각이 라니! 내가 얼마나 마왕다운 행동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줄 알기나 한건가!!! 매일매일 지스의 피 나는 16시간 특훈을 이겨낸 나다. 이런 소문이 나도는 거 알면 16시간이 아니라 20시간씩 나를 볶아댈 거라굿! 나를 누가 그리 중상모략 했단 말이냐? 당장 가서, 그놈 잡아와! 얼른! " 너무너무 화가나서 머리에 김이 다 날 지경이다. 내가 제 성질을 참지 못하고 씨근덕거리자 날 안아든 이놈이 자자, 진정진정.. 그래 , 그래야 착한 아이지? 하며 나를 쓰다듬는다. 이놈이 정 말?! 어디서 애취급이냐! 나는 내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손을 쳐내며 신경질을 부렸다. " 확실히, 네가 마왕이라면 그건 정말 어이없이 와전된 소문이지. 이렇게 예쁜 아기고양이의 어 디가 귀엽지 않다는거지? 누가 대체 그런 소문을.." 지나가던 개가 다 웃겠군. 고양이라니? 볼을 크게 부풀리며 부아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버리 자, 킥- 하며 엘리듀크가 웃어버린다. 내가 자꾸 바둥바둥 대자, 그는 쳇, 어쩔수 없지.. 라고 중 얼거리더니 나를 땅위로 내려놓았다. 그러나 내려놓는 와중에도 부비대는 손길은 여전했다. 우 씨, 나 애 아니라고! 결국 분통을 터트리며 이거 놔아! 하고 그의 손을 떼버리고는 그의 곁에서 몇걸음 물러났을 때였다. 갑자기 등뒤에서 차가운 한기와 함께 나타난 익숙한 따스함이 나를 끌 어안았다. ...이건, 지스? 내가 고개를 돌려 그를 확인하자, 창백한 표정의 그가 나를 보며 안심 한 표정으로 웃었다. " 방에 달려갔더니 안 계시더군요... 덕분에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습니다. 대체 어째서 저런 위험 인물과 함께 계시는 겁니까? 어디 다치시진 않으셨지요? 소중하신 분의 경호도 제대로 못 하다니, 내 이놈들을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 "에, 저기.. 지스?" 내가 채 뭐라 하기도 전에 그는 나를 자신의 뒤로 숨기고는 흉흉하게 변한 표정으로 나를 구출 (?)하려던 엘리듀크를 노려보았다. 빠득 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 주변으로 보랏빛의 마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잠시 멍한 눈으로 나와 지스를 보던 엘리듀크도, 은빛의 영기 를 마구마구 내뿜으며 지스의 마기에 맞섰다. 이 모든 상황이 제대로 이해가 안가서, 나는 지스 의 망토끝을 잡고 그들을 물끄러미 관망할 수 밖에 없었다. 짧았음에도 무척이나 살벌하고 긴 침 묵의 시간은 엘리듀크의 한마디로 깨졌다. " 정말로 그 아이가 마왕인가 보군. 잔혹의 군주인 네가 이곳에 있을 줄이야... 오랜만이로군? 지 스카스. 이거 오랜만의 친구를 만나니 간만에 흥분되는걸? " " 인간주제에 아직 안죽고 살아있었다니. 너도 꽤 하는군 그래. 이 빌어먹을 천신의 개! 대체 이 분을 데려가 무엇을 할 속셈이었느냐! 네 놈은 천마대전의 조약들을 까먹었나? 아직 어리신 이 분을 감히 납치. 공갈. 협박 으로 손에 넣으려 하다니, 내 네놈을 갈가리 찢어 죽여 버릴테다!" 유들유들하게 지스를 대하는 엘리듀크와는 달리, 지스카스는 지나치게 흥분하고 있었다. 아무래 도 내가 갑작스레 방에서 사라져서 굉장히 놀란 듯 했다. 우아함의 극치를 삶의 모토로 지니는 그가 저렇게 욕설을 내뱉을 줄이야.. 그런데 납치, 공갈, 협박이 뭐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가, 지스와 대치중인 엘리듀크의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가 나를 보며 씨익 미소짓는게 느껴진다. 뭐, 뭐냐.. 굉장히 불길한 저 웃음은? 온몸에서 소름이 돋아오르는 그 느낌에 나는 지 스의 망토뒤로 몸을 숨기곤 눈만 빼꼼히 내놓은 채로 대치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불길한 느낌 은 그가 말하는 와중에도 계속 되고 있었다. " 흐흠, 확실히 너라면 나 역시 고전할테지.. 하지만 말이다. 너, 뒤의 그분을 놓고 제대로 싸울 수 있겠나? 이렇게 된 이상 난 사정 봐주지 않을텐데. 그러다가 저분이 다치면 어쩌려고 그러 나? 차라리 그분을 다른 곳으로 보내놓지?" 그의 말에 지스가 화들짝 놀라 몸이 굳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뒤에 숨은 나를 보며, 잠깐 고민을 하더니 조용히, '저쪽에 있는 워프진 쪽으로 가십시오. 방안으로 이동하셔서 절 기다리시는 겁니 다. 아셨지요?' 라 속삭였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워프 진쪽으로 뛰어갔다. 내가 진 위에 서자 그제야 안심이 되었는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동시에 엘리듀크를 견제하던 지스의 어깨에 서 약간 힘이 빠졌다. 이변이 일어난 것은 바로 그 틈을 타서였다. 잠시 지스의 경계가 늦춰 졌던 것을 안 엘리듀크가, 순간적으로 방출되는 영기를 빛의형태로 바꾸어버렸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엄청나게 밝은 빛 이 두 눈에 작렬했다. " 아아악--!!!" 나는 비명을 지르며 두 눈을 감쌌다. 마왕의 신체인지라 상처 수복 능력은 굉장히 빠르지만 아픈 건 아픈거다. 방금의 빛은 하위의 마족이라면 온 몸이 타오를 정도의 강도를 가지고 있었다. 흐 르는 피의 힘덕에 몸이 타는 것은 면했지만, 아무리 나라도 당분간은 두 눈이 보이지 않을 거다. 그러나 그 혼란의 와중에도 지스는 기습적인 공격을 방어했는지 어느새 내 몸을 안고 공간 이동 을 시도하고 있었다. 어쨌든 안심이로군, 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손을 더듬거리며 나를 안아든 지 스의 몸에 손을 대다가 흠칫, 하고 몸을 떨었다. 나와 나를 안고있는 인물의 몸을 감싸고 있는 이 건.. 마기가 아니다. 모든 것을 태울 듯이 넘실대는 이 기운은, 천신의 영기다. ....설마?! 아니지? 그렇지? 이거, 눈 을 잃어 당혹한 내가 착각하고 있는 거지? 갑작스레 너무나 많은 일이 일어나 정신이 아찔해졌 다. 이지러지는 공간 너머로 들려오는 지스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내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있 는지를 확신시켜주었다. 재수가 없어도 유분수지, 이게 .. 대체! 나는 비명을 질렀다. " 지스, 지스! 어디야 지스? 눈이 보이질 않아!!! 어디에 있는거야? 이거 , 놔! 날 지스에게 보내 줘 이 악당--!" 나는 몸부림을 치며 내 몸을 옥죄듯이 안아오는 팔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몸에 가해지는 힘의 강 도는 오히려 더해졌다. 내 비명을 들었는지 지스가 악을 쓴다. " 크아악, 네 이놈 --!!!! 어서 그분의 옥체를 놓아라! 이 무슨 행패더냐, 엘리듀크! 아무리 네가 신의 인가를 받은 용사라지만, 이런 짓을 하고도 살아남을수 있을 것 같은가!!! 폐하, 폐하--!!!!" 그의 부름에 나 역시 지스, 나 여기야-! 하고 부르려 했으나 커다란 무언가가 내 입을 막아버리 길래 악, 하고는 막는 그것을 물어버렸다. 그러자, 윽- 하고 신음성이 난다. 아무래도 내가 물어 버린게 이 고약스런 납치범의 손인가 보다. 그러나 내 입가를 막아버린 그것은 치워지지 않고, 내 고양이는 앙탈도 심하군.. 이라는 복장 터지는 중얼거림만 돌아왔다. 엘리듀크가 호탕하게 외 쳤다. " 으하하, 걱정말아라 지스카스! 이 귀여운 아기고양이는 나의 신부(新婦)로 맞이할 테니, 절대 로 다치거나 죽게 하지 않을거다! 청첩장은 애를 한 다섯정도 낳은 후에 보내주지. 자아, 그럼 잘 있으라고!!" 그의 말이 마쳐짐과 동시에 공간의 전이시전이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급작스런 전이 때문에 가 해지는 압력과 패닉상태의 정신은 결국 기절이라는 선물을 내게 가져왔다. 기절 직전 들린 지스 의 ' 이 변태새끼, 너 잡히기만 해봐! 죽었어! 폐하께 손을 대려 해? 야 임마--!!' 라는 비명을 자 장가 삼아서, 나는 한없이 암흑으로 빠져 들어갔다. *** " 변태." " 응 " " 미친새끼" "그...그래" "나쁜놈" "네" "...이 빌어먹을 강간범" " ......흐, 흠.." 내가 이를 갈며 뱉어낸 마지막 말 때문에 그는 버벅대며 허둥거렸다. 나와 엘리듀크는 지금 인간 계의 리베이드 제국 내에 있는 작은 도시에 와 있었다. 직접 본 건 아니고 엘리듀크가 그랬으니, 틀려도 나는 모른다. 나는 지금 폭신거리는 침대에 누워, 보이지 않는 눈을 치켜뜨고는 엘리듀크 를 향해 살기를 흩뿌리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저놈의 빌어먹을 상판때기를 ( 다시끔 말하지 만, 저놈은 이런 말 들어도 싸다!) 후려쳐버리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대체 내가 뭘 그리 잘못한 걸까.. 왜 하필 천년마다 한번씩 , 하루씩만 있다가 사라지는 불행의 별 아래서 태어나가지고는 이런 돼먹지 못한 고생을 해야 하는가. 얼마 살지도 못했는데 왜 삶 이 험난하고 한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껴야 하냔 말이다. 정말이지 서러운 인생살이,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사는지 싶어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니 옆에 있던 엘리듀크가 화들짝 놀라 파닥거린다. 보지는 못하지만 어떤 꼴을 하고 있을지 눈에 선하다. 누워 있는 나를 보며 해실대면서도, 내가 내뱉는 말 하나하나에 상처받은 표정을 하고 있겠지. 그와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나는 왠 지 내 앞에 있는 작자의 성격을 알 것 같았다. 더불어 앞으로 펼쳐질 나의 운명까지도 말이다. 까무룩 잠들 듯이 기절한 후에 내가 깨어 난 것은, 말도 못하게 욱신거리는 몸의 통증 탓이었다. 미친 듯이 비명을 질러대는 근육들 때문에 도무지 기절이 계속되질 못했던 것이다. 보통의 상처 였다면 자가 수복능력으로 자체 치유가 가능한데도 불구하고 아픈 이유는 상처의 원인이 되는 자가 나와는 정 반대의 힘을 지닌 엘리듀크였기 때문이다. 처음엔 급작스런 워프 때문에 어린 몸 이 뒤틀려서 그런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일어난 후 천천히 몸상태를 확인했을 때, 나는 이 상처 의 원인이 처음의 짐작과 다름을 눈치 챘다. 허리가 녹아들 듯이 흐느적대고 근육과 뼈마디가 삐 걱대는 것까지는 워프의 부작용 때문이란 설명이 가능하다. 그러나... 정말 차마 입 밖으로 내뱉기도 남사스런 부위까지 아픈 이유는 대체 뭐란 말인가? 정 말이지 그 부위가 너무너무 아파서, 며칠간은 화장실도 제대로 가지 못할 것 같았다. 누워서 끙 끙대며 아픔을 호소하자, 옆에서 부스럭 대는 소리가 나더니 단단한 팔이 나를 안고는 토닥거린 다. " 누구...?" -세요, 라고 말하려다가 목이 너무 아프고 음성역시 괴물같다는 사실에 나는 충격을 먹었다. 뭐, 뭐지? 내가 흠칫한 걸 알았는지 손의 주인이 기분 좋은 목소리로- 미안, 하지만 네 목소리가 너무 듣기 좋아서.. 다음부턴 이런 일 없을거야, 내가 너무 흥분해서...- 라고 속삭이는데, 그 속 삭임의 내용 때문에 나는 지난 밤의 기억이 모조리 떠올라 버렸다. 미칠 듯이 몰아가는 열정에 온몸이 녹아들어가고, 차마 방출하지 못한 열기에 흐느끼는 울음은 입술로 봉인되었다. 지나친 쾌감에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깨어나면, 집요하게 매달리며 열기를 피워내는 그가 있다. 너무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다가도, 순간 순간 깨어나는 쾌감의 향을 잊을 수가 없어 매달리고, 또 매달렸었다- 거기까지 기억해 낸 후 나는, 뼈에 사무치도록 부끄럽다는게 무슨 뜻인지 체감해 버렸다. 그리 고 , 한가지 감정이 극에 닿도록 치달으면 그 사실만으로도 기절까지 갈수 있다는 것까지도. 그 렇게 나는 다시 기절해버렸다. 그리고 다시 깨어났을 때, 차가운 물로 내 얼굴을 마사지 하듯이 두드리는 강간범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주먹을 먹여버리고 또 다시 기절했고, 몸을 씻기는 그의 손길 때문에 정신을 차린 후 다시 그에게 주먹을 날리고 기절, 밥 먹으라고 깨우는 놈을 향해 발길질을 하다가 다시 기절...그 런 반복이 계속 되자 놈은 이제 내가 깨어나기만 해도 내 발밑을 벌벌 기게 되었다. 무슨 말을 해도 응응 하며 받아주는 고분고분한 노예하나가 생긴 것이다- 라기에는, 빌어먹을. 댓가가 너무 크다구! 게다가 저런 노예는 필요 없단 말이다. 나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하지만 어쩔까, 이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영웅이란 작자와 나 는 이미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미성년의 마족을 겁탈한 자는 평생토록 그 자의 주 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마신의 저주를 , 이 멍청한 천신의 영웅께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주고 뭐고 간에 그냥 보내버리고 싶었다. 얼굴도 보기 싫고, 음성도 듣기 싫 고, 나를 향해 부드럽게 속삭이는 목소리 까지도 모조리 없애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이 녀석은 나와 함께 평생을 지내겠다며 끝끝내 버티는 것이다. 내가 마신께 청원해서 그냥 보내준다고 하 는데도! 정말이지 미칠 노릇이었다. 욕을해도 응, 때려도 그냥 받아주고 하는 이 녀석을 떼어낼 방법이 정녕 없단 말인가? 오히려 녀 석은, 은근슬쩍 나를 설득하기까지 했다. 지금 눈도 안보이는데 대체 혼자서 어떻게 하려고 하느 냐, 인간세상은 처음일 텐데 혹여 나쁜 놈이 무슨 짓을 하면 어떻게 대처할거냐, 게다가 보아하 니 마력도 바닥이고 상처역시 자연 회복능력만 사용해서 더딘데 그 몸으로 어떻게 홀로서기를 한다는 거냐.. 등등, 끝도 없이 이어지는 설득의 행렬에 나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피폐해진 정신 상태로 저것들을 판단하기 무척이나 힘들었고, 에라 - 모르겠다, 라는 자포자기의 심정역시 어 느정도 들어가 있었으리라. 그런 내 상태를 정확히 파악한 엘리듀크는, 경악스럽게도 서로의 아명을 부르는 것까지도 허락 을 얻어내어 ( 인간 식으로 말하면, 여보- 자기 정도의 호칭이다. 대체 나는 무슨 생각이었던걸 까..?) 결국 나와 그는 지금 인간계를 유유자적하게 여행하고 있다. 시력도 어느정도 돌아왔겠다, 다시 마계로 돌아가고 싶어도 당분간은 지스를 볼 낯이 없어 가기 좀 그랬다. 엘리와 서로 아명까지 부르는 사이가 되었다지만, 부끄러운건 부끄러운거다. 게다가 무슨 잔소리가 쏟아져 나올지 두렵기도 하고.. 그래서, 기왕 나온 김에 여행이나 해보지 뭐-라고 결정해 버렸다. 그런 나의 마음과는 달리 엘리 의 속셈은 조금 다른 듯 하지만. 지난번 마을에서 일기를 산 그는 나와 자신의 여행을 수필 형식 으로 정리하고 있다는데, 듣자 하니 그냥 여행이 아닌 자그마치 신혼여행이라 적고 다닌다 한 다. 내 말에는 뭐든지 따라주지만, 자기의 마음에 드는 것은 끝끝내 관철해 내는 그인지라 나는 설득을 아예 포기했다. 그래, 네 멋대로 해라.. 니 일기지 내 일기냐? 그런데, 한가지 궁금한 게 있다. 내가 그렇게 급박한 상황에서 납치를 당했는데도, 왜 지스는 나 를 찾으러 나오지 않는 걸까? 그라면 아무리 작은 흔적이라도 끈질기게 따라 붙어 나를 찾아 낼 수 있을텐데. 나의 이 의문에 엘리는 글쎄.. 아무래도 찾는게 힘든게 아닐까? 라며 내 의문에 답 을 해주었지만, 은근슬쩍 흘린 후훗.. 이란 웃음는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 뭐 좋은게 좋은거겠지.. 이것도 나름대로 즐겁고 말이야. 무엇보다, 용사와 함께 여행하는게 어 디 그리 쉬운일이야? 내게 절대적인 애정을 바치고 내 뜻만 따라주는 그런 용사가 흔한건 아니 니까. 게다가 , 어쩌면 나 역시 조금은 엘리를... -할짝- ".....헤? " 순간적으로 당황해버렸다. 깊이 생각에 빠진 터라 방금의 행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에 나 는 눈살을 찌푸리며 엘리의 싱글대는 얼굴을 째려보았다. 그러니까, 방금 ... 내 볼을 핥은거 맞 지? 내가 이유를 추궁하는 엄한 눈초리를 하자,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 그런 무방비한 얼굴을 보니까 왠지 핥아주고 싶었어. 실은 더 핥고 싶지만.. 뭐 여기서는 싫 지? 나머지는 있다 밤에 둘만 있을 때 해드리지요, 부인. " 하고, 내게 농염한(...) 눈빛을 보내는 엘리를 보며 나는 탄식했다. 처음엔 그저 근엄하고 딱딱 한 성격인 줄 알았더니, 웬걸.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점점 더 하는 행동이 응큼해지고 능글맞아 지는 데, 요즘들어서는 내가 차마 통제하기도 힘들 지경이다. 그 말이 끝나자 마자 슬금슬금 옷 자락 안으로 기어들어 오려는 손을 보며, 눌러 담던 화를 결국 터트렸다. 젠장, 조금은 좋게 봐주 려고 했던거 모조리 다 취소다! 이 짐승같은 자식! " 젠장, 손 안치워? 내가 밖에선 손대지 말랬지, 그런데 왜 요즘은 허구헌날 비비적대냐 이 변 태! 게다가 내가 그 부인이란 소리 집어 치우랬어, 안그랬어? 저리가! 절루 안가? 그래, 그렇다 이거지. 그럼 내가 가주지!" " 앗, 부인! 아니아니, 카이, 잠깐 기다려!" 흥이다. 내가 멈출줄 알아? 너는 평생 나를 쫓아 와야해. 하극상은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구. 그의 손길을 재빨리 피하고 마을 밖으로 달음질친다. 그런 나를 따라잡기 위해 헐레벌떡 뛰어오 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속으로 작게 웃음 지었다. 그래, 엘리. 당신은 그렇게 평생 나를 따라 와. 기분이 좋고, 다리가 아플 때엔 당신의 손에 잡혀줄테니까. 그땐 당신이 그렇게 듣고 싶어하는 한마디도, 함께 들려줄게. 새파란 하늘빛이 시리게 아름다운 어느 봄날. 따스함에 설레이는 풀 내음을 한아름 안고, 가슴속 어디선가 피어오르는 작은 새싹을 위해 찬란 한 봄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자. 움이 튼 씨앗이 아름답게 자라나 새빨간 꽃을 피우면, 그 꽆잎 하 나 하나에 내 마음을 담아 네게 선물할 테니. 그러니까, 지금은 움튼 싹을 향해 노래를 부르는 거야. 약간은 어설프지만 설레임을 담은, 그런.. 노래를. 둘이 함께, 그렇게 싹을 틔우는 거야- -마왕과 용사의 행방불명, 마침. 마왕과 용사의 행방불명 외전 엘리의 신혼일기 ( 부제: 용사의 마왕 납치사건의 전모와 그 이후에 대한 발칙한 스토리 ) 내 이름은 엘리듀크 테이레스만 쟈크레미 위슈델란. 직업은 용사, 성별은 남자. 종족은 인간이고, 나이는 230세 정도 되었다. 내 나이를 내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이유는, 180세가 되는 생일날, 생일 케잌 위에 더 이상 초를 꽂을 자리가 없다는 것 을 알게 된 이후 나이세기를 집어 치워버려서 이다. 그 이후로는 그냥 커다란 초 하나만 꽂아 놓 는다. 진작에 이랬다면 좋았을걸, 괜히 그 동안 고생했다. 대체 초를 꼽는 시간만 30분이 걸릴게 다 무어란 말인가. 나는 원래 불필요한 노동과 헛되이 쓰는 시간을 싫어한다. 즉, 효율성 있는 생활을 좋아한다는 말로 이것은 내가 어릴 때부터 고수해온 생활 습관 중 하나 다. 덕분에 부지런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보기드문 바른생활 용사란 웃기지도 않는 꼬리표 가 붙기도 했지만, 나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사람들은 이 사실에 코웃음을 친다. 뭐 , 그들의 그 행동에 화를 낼 이유는 없다. 나도 , 내가 바른 생활 사나이라는 별칭이 붙었다는 사실을 알았 을 때 세시간을 쉬지 않고 웃어댔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때까지 해오던 일상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귀찮았으니 말 이다. 규칙적인 생활이 편하다고 하면 웃을텐가? 비웃고 싶으면 마음껏 웃으라. 물론, 그 뒤 부 디 내가 쫓아가지 못할 곳으로 필히 도망가 주길 바란다. 나도 되도록 무익한 살생은 피하고 싶 으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200여년 전, 천신의 제야에서 용사의 칭호를 내려 받은 이후 나는 정말이지 단 하루의 휴가도 없이 천신의 용사들이 하는 일들을 수행해왔다. 인간의 몸으로 천신의 인가를 받 기가 얼마나 힘든지 알기에, 신의 계시가 내려왔을 때 나는 주저 없이 내 모든 것을 버리고 천계 로 따라왔다. 어느정도 우월감이 없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천신께서 내린 일을 완수할 때마 다, 언제나 주위에서는 나를 위해 찬양의 노래를 불렀고, 나는 그것을 기꺼이 즐겨주었으니까. 그러나 우월감이 의무감으로, 의무감이 권태로 변하는 것은 금방 이었다. 칭송의 어구들은 금방 질려버리고, 자극적인 일들은 줄어만 갔다. 돈도, 권력도, 여자도 내 마음을 다 잡기엔 역부족이 었다. 그나마 날 살아있다 느끼게 하는 것은 마족과의 전쟁이었다. 내가 용사의 직위에 있는 200여년 간 대규모의 전쟁은 3번, 국지적인 전투는 수도 없이 일어났고 나는 그것에 빠짐없이 참전하여 위용을 드높였다. 그러나 제 24차 천마 대전이 종전된 후 천계와 마계는 영구 평화 협정을 맺었다. 나와는 달리, 그 들은 이제 전쟁이라면 몸서리치도록 지긋지긋해 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내 자신이 인간이라 는 사실을 저주했다. 아니, 몸과는 달리 나의 정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저주했다. 지나치게 긴 시간을 견뎌 내는 것을 배우지 못한 나는, 이 지긋지긋하게 이어지는 일상을 여상스레 받아들이 기가 힘들었다. 세상은 정말이지 지나치게 평화로웠다. 그 지루하고 지리한 평화의 독에 나는 점차 부식되기 시작했다. 얼굴은 점차 웃음을 잃어갔고, 가슴안의 감정은 권태로만 채워져 움직 이는 걸음마다 허무의 한숨이 배어나왔다.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웃음과 행복의 기색들은 나를 그들의 세계에서 점차 유리시켰다. 영광의 자리인 용사의 칭호는 이제 내게 있어 증오스러운 족 쇄에 지나지 않았다. 대체 천신은 언제쯤이면 나를 이곳에서 해방시켜 주실건가. 그의 말이 없이는, 나는 죽을 수 조 차 없었다. 나의 모든 것은 그의 말에 매여있었다. 정말이지 지나치게 가볍고, 또한 어려운 목숨 아닌가. 어지간한 일로는 한숨소리조차 내시지 않는 그의 말을 기다리다 지쳐, 나는 결국 신전 의 천왕폐하를 알현했다. " 대체 언제쯤이면 제가 자유를 얻게 되겠습니까? 당신은 천신의 유일무이한 신관이시니, 그분 의 뜻을 알고 계실게 아닙니까-" 신전에 들어가, 그를 정중히 배알한 나는 단도 직입적으로 물었다. 대체, 나는 언제쯤이면 이곳 에서 벗어나게 됩니까? 이대로 영원히 사는게 신의 뜻이라면, 차라리 죽는게 나을 겁니다-라는 나의 이 무례한 말에, 폐하는 부드럽게 웃으시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 엘리듀크, 당신의 마음의 고뇌는 천신께서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대가 얼마나 힘들어하고 괴 로워하는지, 저 역시 알고 있어요... - "허면, 어째서!!! 어째서 신은 저를 이렇게 내버려 두시는 겁니까? 저는, 이제 정말이지 --!" 숨이 막혀와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대체, 알고 계시다면 왜 나를 이렇게 두시는 건가. 이것 이 그 기나긴 시간동안 당신을 위해 한 일의 대가 입니까? 너무하십니다, 잔인하십니다! 당신의 종이 이토록 괴롭다는 것을 아신다면, 그 주인 된 도리는 하셔야 할 것 아닙니까... 너무나 분해 꼭 쥔 손에서 피가 스며나오자, 단 위의 분이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를 듣고서야 나는 내가 지나치게 흥분한 나머지 저 다정하신 분께 실례를 범한 것을 알았다. 고귀하신 분의 처소를 부정한 것으로 더럽히다니.. 나는 황급히 피를 산화시켰다. 그런 내게 건네는 폐하의 음 성에는 나를 향한 애정이 숨김 없이 드러나 있어, 나는 더욱 죄스러워졌다. - 이런, 신의 집을 피로 더럽힐 셈이십니까, 용사 엘리듀크여.. 허나 당신을 책할 생각은 없답니 다. 그러기엔 당신의 고통이 너무도 생생하니까요.. 저는, 진작부터 그대의 일들을 알고 있었습 니다. 허나 당신의 짐을 덜어줄 권한이 제게 없었기에, 그대를 그리 방치했었지요.. 부디 너무 노 여워하지 마십시오. 이제- 얼마후면 그대의 긴 권태의 기다림도 끝이 날테니까요. 그러니 조금 만 더 인내해 주세요, 엘리듀크.. 당신의 운명이 조금 더 준비 될 때까지 말입니다..- "...운명...? 그것이, 무엇입니까 ?" 갑작스레 나온 운명이란 단어. 그렇게 아름다운 울림의 단어는 처음이었다. 그 짧은 순간동안, 그 형태 없는 무언가는 나의 온 마음을 앗아갔다. 나는 천왕께 절실하게 매달렸다. 그것이 무엇 인지, 언제쯤이면 다가 올것인지, 어떠한 형태로 나타날 것인지. 그러나 그는 매정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 ...제가 말씀 드릴수 있는 것은, 여기 까지가 다입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듣고 얼굴을 잔뜩 찌푸린 내가 우스웠는지, 그의 뒷말은 즐거움이 어려있었다. 그는 말을 이었다. - 분명, 첫눈에 알아 보실수 있을 겁니다. 첫눈에요.. 그 고귀하고 아름다운 빛은 당신의 모든 것 을 사로잡을 겁니다. 권태로만 채워진 당신의 가슴을 일격에 태워줄거예요, 나는 그리 믿어 의심 치 않습니다. 운명을 잡기까지는 험난한 장해를 넘어야 하겠지만, 당신이라면... 그래요, 당신이 라면 그 모든 것을 넘어서 행복을 잡을 수 있을 테지요.- 장해 어쩌고 하는 부분은 모조리 넘겨들어버린 나는, 폐하의 말에 잊혀졌던 가슴속의 희망을 다 시 찾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환희였다. 이 지독한 무채색의 세계를 일순간 빛으로 화하 게 한, 눈부신 기적이었다. 나는 두 말 없이 그를 뒤로 한 채, 신전을 빠져 나왔다. 고맙다는 인사 를 덧붙이며, 나는 크게 절을 하고는 희망 어린 발길로 세상을 향해 나아갔다. 그곳을 벗어나기 직전 폐하가 던진 - 하지만요, 상대의 동의 없는 행위는 나쁜거예요. 알겠어요?- 라는 영문모를 질책하나를 가슴속에 묻은채. 그리고, 예전과 같은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 그 날 이후, 나는 기존에 내가 지켜오던 여러 가지 생활을 변화시켜 나갔다. 어떠한 운명이 내 앞에 기다리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종전과 같은 딱딱하고 고루한 방식으로는 그 운명을 만족 시켜줄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의 이 새로운 생활방식은, 조용한 천계마저 활기차고 시 끄럽게 변화시켜나갔다. 침체되어있던 천계의 공기가 매일 벌어지는 새로운 사건들로 술렁거리 는 것이 마음에 들었던 나는, 천계인의 항의와 원성을 가볍게 무시해주었다. ( 견디다 못한 천계 인 들이 천왕에게 몰려가 대체 무슨 소리를 했길래 저리 사람이 망가졌냐고 탄원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엔, 조금 양심의 가책이 들었다. 물론, 그들이 아닌 - 갑작스레 변한 내 모습덕에 곤욕 을 겪고 계실 폐하 때문이었지만 )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마계의 마왕이 급작스레 죽고, 그 위(位)에 나 어린 아들이 올랐다는 소문 이 들려왔다. 처음엔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겨버렸다. 제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하고 죽은 아비 덕 에 아들만 고생을 죽어라 하겠군- 하고 그저 짧게 죽은이와, 그의 불운한 상속인에게 짧은 조의 만을 표했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그 후로 계속해서 들려오는 마계의 신왕(新王)에 대한 믿기지 않는 소문들은 조금씩 내 흥미를 유발시켰다. 그중 압권은, 마왕이 되기 싫어 필사의 탈출을 감행했는데 실수로 탈출경로 를 잘못 잡아 환마의 숲 중앙에서 구출되었다는 소문이었다. 구출 당시 환수들에게 시달리다 못 해 바싹 마른 몸으로 자길 잡으러 온 신하들에게 매달렸다는데, 그 불행하기 그지없는 마왕의 모습이 자꾸 눈앞에 그려져 나는 고소를 금할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탈출을 하면 마계인도 가기 를 꺼리는 그런 곳으로 들어갈 수 있는 걸까? 분명 마왕 역시 그 사실을 알고 필사적으로 숲을 빠 져나가려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가 발견 된 곳은 숲의 중앙이었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 마왕은 얼마나 허탈해 했을 것인가. 그 이후, 그에 대한 소문이 들려올 때마다 나는 귀를 기울였다. 한결같이 웃기기 그지없었다. 업 무시찰을 나갔다가 길을 잃어 결국 미아 보호소에서 발견된 일이라던가, 그리핀의 등 위에 타보 겠다고 바락바락 우기다가 연못위로 불시착한 일, 궁 안의 침입자를 위한 미궁에 잘못 빠져 사 흘 밤낮을 헤매다가 구출 된 일... 소문 속의 그는 쉴 새 없이 사건을 일으키고 다녔다. 마계의 신 마왕이 일으키는 사건들은 이제 마계의 신민들뿐만이 아닌 천계인 들의 입에서도 오르내리고 있 었다. 나름대로 대단한 마왕이 아닌가. 마계인이라면 무조건 꺼리는 눈치를 보이던 천계인들의 의식을 이 마왕은 자기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조금씩 바꾸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에 대해 호감을 키워나가던 나는 문득 그 욕망을 입 밖으로 내보이고 있었다. "...만나고 싶군." 부지불식간에 말을 하고서, 나는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곁에 있던 천계인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나의 이 느닷없는 말에 엄청나게 호기심을 가지게 된, 궁금증으로 번 뜩이는 눈빛이었다. 그 부담스러운 빛에 나는 조금 당혹스러워졌다. " 호오... 누굴 두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 나는 침묵했다. 눈앞의 이 천계인은 나의 오랜 친구로, 만난 기간이 오래 된 탓인지 어쩔 땐 나 에 대해 나 보다 더 정확히 파악해냈다. 내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려버리자, 역시나- 졸졸졸 따라오며 나를 졸라댄다. '누구예요? 누구죠? 에이, 말해줘요~ 앗 치사하다! 엘리듀크님, 자꾸 그러기예요? 너무하신다아~ 좀 알려주세요, 누구를 만나고 싶으신 거예요오~? 말 안하면 나 소 문 낼거예요! 천하의 엘리듀크가 짝사랑의 상대를 만나지 못해 ...' 거기 까지 들었을 때 나는 이 귀찮은 천계인의 머리를 살짝 때렸다. 아야, 하고 머리를 감싸쥐며 글썽대자, 결국은 입을 열어 야 했다. " 미안하지만 네가 생각하듯 그런 달콤한 일은 아니다. 그저..." " 그저-? 그저 , 뭔가요? " 머뭇거리는 기색이 마뜩찮은지 그가 인맛살을 찌푸리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에 빠져들었 다. 그저- 그래 그저.... 뭐란 말인가? 곤혹스러워졌다. 대체 나는 무얼 원하고 있는거지? 그냥 .. 만나고 싶었던건가..? 단지 그것뿐이란 말인가.. 내 눈빛이 깊이 침잠해 들어가는 것을 보며, 그가 킥- 하고 웃었다. " 언제나 생각하는 것지만, 엘리듀크님. 당신은 말이지요, 자기의 마음에 대해서 너무 모르는 것 같아요. 타인에게도 무관심, 자신에게도 무관심.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 당신은 감정이 거세된 존재 같아서 얼마나 안타까워 보였는지.. 모르시지요? 그래서, 저는 요즘의 당신이 더 마음에 들 어요. ...물론, 당신이 일으키는 분란들은 그닥 마음에 들지 않지만요." 뜻밖의 말이었다, 나는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내가, 그렇게 보였단 말인가? 그는 부끄러운지 혀를 빼죽 내밀고는, 장난스레 웃으며 내 손을 맞잡아 왔다. 천계인 특유의 찬 체온 탓에 손이 식 어왔지만 가슴 어딘가는 따뜻하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 그러니까 -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원하는 걸 모를 때엔 그냥 마음가는 대로하란 거예요. 때론 말 이지요, 머리보다- 마음이 , 몸이 먼저 가장 필요한걸 찾아내곤 해요. 마음을 헤아리는게 힘들다 면, 자신에게 질문해 보세요. 지금 내가 가장 하고 싶은게 뭐지? 라구요. 그럼 무의식의 안에 보 이지 않게 숨어있던 중요한 무언가가- 당신을 이끌 거예요." "... 원하는 대로... 말인가? " 그의 말을 따라 중얼거리니, 그가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그의 말대로 자신에게 질문 해 보았다. 내가 지금 ,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은 뭐지-? 눈을 감고 마음속, 본적 없는 욕망을 향 해 나는 손을 뻗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소중한 친구의 이마에 키스를 하고 있었 다. "다, 다, 다, 당신--!!!" 나는 피식, 하고 그에게 속삭였다. 하고싶은 대로 하라 하지 않았나? 나는 지금 네 이마에 입맞추 고 싶었다. 그래서 한건데, 뭐 잘못되었나-? 라고 하니 그의 시선이 멍해진다. 나는 말을 이었다. "고맙다, 네 덕분에 결심이 섰어. 네가 말한대로, 한번 마음속의 욕망에 따라 보겠다... 그럼, 나 는 이만 가보겠어. " 친구의 눈이 커지며 입을 벙긋댄다. 유쾌하게 웃어제끼며, 맞잡은 손을 놓고 이별을 고했다. 어, 어, 어디가는 거예요-! 겨우 정신을 차린 그가 비명처럼 묻자, 나는 마계의, 마왕성으로-! 라는 대답과 함께 오랫동안 접어놓은 금빛 날개를 펼쳐 창공 속으로 뛰어들었다. '맙소사, 마왕성? 천 신이여-! 제가 대체 무슨 짓을 한거예요? 비상, 비상-! 모두 어서 신전으로 가요! 큰일 났어 요!!!!' 라는, 친구의 발랄한 배웅이 더없이 유쾌한 날이었다. 마왕성과 마왕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 호오, 이것 꽤 멋진 장식인걸? 저건.. 역대 마왕들의 초상화인가. 마족들의 대부분이 아름다운 것에는 사족을 못쓴다는 말은 정말이었나 보군.. 지나칠 정도로 화려하잖은가, 이것은. " 중얼거리며 검을 휘두르자, 검격 안에 들어와 발악하던 마물들의 단말마가 진득하게 따라붙었 다. 베어짐과 동시에 확- 하고 산개하는 피 보라를 적당히 피하며, 나는 마왕성의 내부를 느긋하 게 감상했다. 단아하고 우아한 천계의 것과는 달리, 이곳의 모든 것은 화려하고 눈이 부셨다. 하 찮게 여겨지는 돌의 돌쩌귀는 물론이거니와 거인의 다리보다 더 단단해 보이는 기둥까지도, 그 것을 제작한 장인의 고뇌가 느껴졌다. 재료는 그렇다 치고, 대체 어디서 이런 장인들을 구한걸 까? 이 정도의 실력이라면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도 남을 만한 자였을 텐데. 나는 자신의 재능을 세상에 내보이지도 못하고 마왕의 악취미에 젊음을 바쳤을 이름 모를 장인에게 짧은 묵념과 함 께 피를 바쳤다. -키에에에엑--!!- 가는 걸음마다 따라붙는 마물이 이제는 슬슬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아까 갇혔던 미궁 의 외벽을 일직선으로 파괴해가며 나온 게 사단이었나 싶다. 그 전까지만 해도 마물의 숫자가 이 렇게까지 많지 않았었는데 . 시끄러운 소요를 일으키는 침입자를 향해 성 내의 마물들이 모두 그 소요의 중심지로 몰려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저런 마물들이 심각한 위협이 되는 것은 아니다. 허나 이렇게 그 많은 숫자들을 일일이 베어내니, 슬슬 도망가기 위한 체력이 걱정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일주일을 날아 도착한 마왕성은 그 초입부터 범상치 않았다. 평범한 자는 들어 가지도 못하게 절대방어 결계를 쳐 놓은 외성은 그렇다 치더라도, 내궁 안에 설치되어 있는 함정 은 그가 피하기 힘들 정도의 위험천만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제거하고 들어가기 귀찮아서 결국 벽을 부숴버리는 방법을 택했지만, 그것 이 함정 대신 마물을 불러오는 것임을 알았더라면 귀찮아도 함정쪽을 택했을 것이다. 나는 비틀 린 웃음을 지으며 다시 내 앞을 가로 막고 이를 드러내는 늑대모양의 마물을 향해 검을 휘둘렀 다. -크어어어어어어....- 원한에 가득한 눈빛으로 날 쏘아보며 사그라드는 늑대의 눈을 보며,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저것은, 그냥 단순한 침입자를 바라보는 눈빛이 아니다. 마치- 그래. 마치, 새끼를 살리 고자 하는 어미의 독기 어린 , 그런 눈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가면서까지 지키려는 상대가 내가 가는 이 길목의 어귀에 있는 것이다. 하찮은 마물까지 목숨을 버리는 충정을 지니는 상대 는, 온 마계에 있어 단 하나. " 아무래도 내가 찾아오기는 잘 찾아온 것 같군. 여긴, 마왕이 사는 진짜 마왕궁이다-" 수많은 현혹과 매혹, 함정과 기만들로 단단히 보호되어 외부인의 침입을 방어해내는 마왕성이 존재하는 진짜 이유는, 마왕의 비밀스런 거주지인 마왕궁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아는 자는 많지 않다. 나도 우연찮은 기회에 듣게된 사실 중 하나로, 이곳에는 세상의 온갖 보화와 아 름다움, 고대의 은비학의 정수가 보관되어 있다 한다. 안타깝게도, 내가 관심이 있는 것은 - 위 에 열거된 그런 물건이 아닌, 이 궁의 주인이지만. " ... 그런데, 대체 문은 어디 있는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마물들을 처리하면서 나는 계속하여 이 기나긴 회랑을 지나쳤으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이 회랑이 끝나는 지점은 보이지 않았다. 아까부터 계속해서 신경이 거슬린 이유가 이 때문이었나. 나는 뒤에서 달려드는 박쥐모양의 마물을 다시 한번 쳐내고, 자리에 멈춰섰다. 마법의 영역에 빠진 것을 알아 챈 이상, 더 이상 움직이는 것은 무의미한 체력낭비에 불과했다. 마법의 본질은 세계로 귀결되고 그리하여 부자연스러움을 전제로 하여 특이점을 찾기란 불가능 하다. 내가 눈을 돌려야 하는 곳은 마법의 이음새가 아닌, 마법을 발동시킨 원천 그 자체. " 마족의 마력과 천족의 영력은- 분명, 서로를 갈구하는 자석의 두 극점과 같지.. " 나는 서서히 몸안에 묻어둔 영력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극과 극의 만남은, 무(無)를 가져온다. 나 는 그 사실에 주목했다. 그리고 , 그 순간부터 눈앞의 모든 것이 뒤집히기 시작한다. 일그러짐이 만들어내는 무한의 뫼비우스가 영력과 결합되면서, 그가 만들어내는 이음새의 너머가 흐릿하게 비친다. 거무틱한 환상너머로, 그가 지키고자 하던 소중한 진실이- 이윽고 그 기만을 깨부수며 내 눈앞에 다가왔다. 마법이 중화되자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은, 여태 봐왔던 화려함을 다 무색케 하는 소박한 디자인의 문이었다. 뭔가 약간 삐끗한 느낌이다. 이- 소박한 문 안쪽에 마왕이 있단 말인가? 왠지 모를 의구심이 마음 한켠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것을 나는 애써 무시했다. 설마, 아니겠지. 그렇게 겹겹이 보호하고 있던 방이 마왕의 방이 아니라니. 그러나 쾅-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을 열어제치고 그 안을 보았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숨 을 들이켰다. 동시에 나의 실수 역시 인정했다. 여긴 마왕의 방이 아니다- 라는 것을. 나름대로 의 멋이 있긴 하지만, 화려한 궁의 주인이 이런 방에서 거주한다는 것은 난센스다. 이런, 처음부 터 다시 찾아야 하는건가- 라고 중얼거리는데 문득 시야에 아이 한 명이 들어왔다. 발치까지 늘어진 머리칼이 까마귀의 깃처럼 새카매 인상적인 아이였다. 아이는 커다란 침대 위 에 앉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눈과 마주치자 가슴이 덜컹, 하는 소리를 냈다. 응? 덜컹? 그 갑작스런 변화에 당황하는 나를 진정시킨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당신, 누구야? - 라고 묻는 아이의 목소리였다. 약간은 치기가 어렸으나 깔끔하고 단정한 느낌의 미성. 그 마력적인 목소리 에, 잔뜩 부축였던 경계심이 속절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주변에 무슨 함정이 있을지도 몰랐는데, 당시의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한채 충동적으로 아 이를 향해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본 아이의 모습은, 아름답다기 보다는 뭐랄까- 그래, 귀 여웠다. 젖살이 빠지기 시작하는 동그만 얼굴, 빛을 받지 못해 파리한 피부 아래 비치는 발그레 한 핏기를 보니 손을 내어 쓰다듬고 싶어지는 것이다. 이름을 말하자 해맑게 웃으며 똘망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그 순진함이라니 , 맙소사. 아무래 도 이번대 마왕의 취향은 이런 아인가 싶어 , 나는 처음으로 마왕에 대해 분노라는 감정을 보냈 다. 아이와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다 보니 더욱 커지는 그 감정이라니. 나는 아이를 데려가 기로 마음먹었다. 이미 마왕을 만나겠다는 생각은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보아하니 아이 역시 마왕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눈치라, 그만 아이를 들고 방에서 나와버렸다. 바둥대는 아이가 내려달라 보챘지만 나는 고개를 흔들며 아이의 이름을 물었다. 그때까지만 해 도, 정말 다른 뜻은 없었다. 그냥 아이가 참 귀엽구나, 이러니 마왕도 혹한게지.. 라는 생각만 했 었다. 이름에 대한 것은, 다만 아이의 이름을 알면 부모를 찾기 더욱 쉬워지지 않을까- 라는 막연 한 기대심리로 물었을 따름이었는데... 아이가 벌컥 화를 내며 이러는 것이다. 내가 마왕이다- 이 바보놈! ...이라고 말이다. 처음엔 잘못 들었는가 했다. 그런데 씩씩대며 날 바라보는 아이의 얼굴이 , 자기가 말하는게 거 짓말이 아니라 주장하고 있었다. ...마왕? 이 작고 귀여운, 순진하기 그지 없어보이는 아이가? 약간 얼이 빠진 나는, 세간에서 말 하는 신마왕에 대한 소문들을 입에 담고 있었고 그 말을 들은 아이는 더더욱 화를 냈다. 결국 나 는 아이를 땅위로 내려 놓을 수 밖에 없었다. 저러다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 아닌가. 그러나 그를 내리자마자 손끝에서 사그라드는 그 달콤한 온기가 못내 아쉬워져 아이를 부비대다가, 아이가 내 손을 벗어나버렸다. 온기가 사라진 손을 보며 나는 잠시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갑자 기 나타난 아이의 보호자를 바라보며, 나의 기분은 급격하게 하강일로를 걷기 시작했다. 아는 얼굴이었다. 분명 불유쾌한 만남을 가진 자중 하나였지. 그러나 기분이 나쁜 것은 다른이유 에서다. 나는 그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를보면서 이죽거리긴 했어도, 그가 내 말에 살기 를 내뿜으며 받아쳤어도 - 이상하게 그에게 느껴지는 감정이라고는 귀찮아, 이것 하나였다. 나 의 눈은 그가 아닌 그 뒤편에 숨은 아이를 향해 가 있었다. 나를 보며 화들짝 놀라 보호자 뒤에 숨는 그, 소중하게 다루어지는 그 때문에 심장이 뒤틀리는 것 같다-. 대체 왜 이러지? 만난지 얼 마 되지도 않은 아이 하나 때문에-! 그러나 나의 이 경악은 오래 가지 않았다. 갑작스레 치밀어오 른 욕망의 속삭임에 나는 점차 영혼을 빼앗기고 있었으니까. -귓가에, 작은 속삭임이 들려온다. '....싫어...' 그와 동시에 내려앉는 심장. 이토록 이것이 격렬하게 반응한 적은 처음이었다. 조심스레 물어본 다. 그래... 심장이여, 나의 심장이여. 나는- 대체 무엇이 싫은 건가...-? 그러자 격렬하게 답해오 는 그가 있다. 익숙치않은 그 감정에 묻혀 자칫 신음이 나올뻔 한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 손대지마- ... 그 손을, 떼. 그건- ' 망토뒤로 숨은 아이의 얼굴이 조심스레 나타나며 나를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나도 모르게 짙은 웃음을 보냈다. 그리고 , 아까부터 빙빙돌며 나올생각을 않던 감정의 한자락이 수면위로 살 포시 떠오르니, 그제야 나는 내가 무얼 원하고 있었는지 알았다. 감정이 거센 물결이 되어 내 몸 을 흔드니, 나는... ' ....저 아이는, 내 것이다. 내가, 이 내가- 원하고 있어!!! ' 아이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너무나 애절하고 간절하게, 미칠듯한 갈망으로- 아이의 모든 것을 원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급격한 이 마음의 변화에 주춤했지만, 이내 떠올린 친구의 말은 내 이 망설임을 모조리 날려버렸다.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하라- 그러면, 그대가 진정 바라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되리니. 나는 지금 저 뒤에 서있는 사랑스런 아이를 원한다. 도대체 왜 원하는 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없으면 죽어버릴 것 같았다. 아이의 모습이 이미 심장 깊숙한 곳에 생채 기를 내었으니, 그라는 제방 없이는 살아갈 수 없으리라. 예전에, 폐하께서 해주신 말은 정말이었다. -분명, 첫눈에 알아 보실수 있을 겁니다. 첫눈에요.. 그 고귀하고 아름다운 빛은 당신의 모든 것 을 사로잡을 겁니다. 권태로만 채워진 당신의 가슴을 일격에 태워줄거예요- 아아, 그랬습니다. 나의 왕이여, 당신의 말이 이제 무엇인지 알 것 같습니다. 당신께서 말씀하셨 으니, 저 아이는 제 운명이 분명할테지요? 그렇다면 저는 양보할 생각이 없습니다. 이제 그는 제 영혼이 다할때까지, 제 곁에서 있어야 하니까요. 설령 신의 섭리를 어지럽히는 짓이라 해도- 이 미, 늦은 일입니다... 나는 다짐했다. 오늘 이 순간 이후로 그는 나의 것이 되리라 . 너는, 나의 운명이고 그리고 너 또 한 내가 운명이라 느끼게 해줄 것이다. 설령 사신이 내 목을 친다 해도, 죽음의 끝에서 살아 돌아 와 너를 모조리 소유해 버릴테니까. 가늘게 실눈을 뜨고, 그들을 바라본다. 내가아닌 다른 이 에 게 미소하는 아이와, 그를 막아서는 방해물이 이제는 못 견딜 정도로 불쾌해졌다. 용사의 정의 고 뭐고간에 이제는 다 소용없었다. 갖은 비열한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나는 그를 가질 생각이 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다소의 속임수마저 불사한 채, 노발대발 날뛰는 방해물을 가볍게 떨치고는 아이를 납치해버렸던 것이다- *** "웅, 엘리- 뭐해?" 목에 매달려 대롱대는 그의 몸을 가볍게 안고 입술에 키스를 한뒤, 쓰고있던 펜과 일기장을 덮 어 짐속에 넣었다. 간절한 눈빛으로 저게 뭔데? 응, 뭐야아-? 라고 묻는 카이가 정말이지 너무나 귀여워서 정신을 못 차리겠다. 열정적인 몸짓으로 입술을 부딪혀나가자, 아씨- 불...꺼! 불! 앗, 잠깐, 빨리! 너 저거 안끄면 안햇! - 이라는 그의 말에 순순히 따라 불을 끄고, 이제 좀 조용해진 그를 안고는 걸쳐진 의복을 하나씩 벗기기 시작했다. 처음의 앙칼진 태도와는 달리 , 이젠 내가 원한다는 뜻의 시선을 보내도 얼굴만 붉힐 뿐 그다지 반항하지도 않고, 때론 아응- 하는 신음도 간간이 내준다. 적당히 자극을 해주며 그의 몸을 안아 가려는데, 다시 그가 손을 내밀어 내 움직임을 저지한다. 탁한 욕망탓에 왜-? 라는 말과 함께 막 힌 손대신 입술로 그의 어깨를 지분대자, 아까 - 그거 뭐였는지 아직 대답하지 않았잖아. 대답해 줘야지.. 라고 꾸물대며 움찔거리는 그의 행동에 더 느껴버렸다. 아, 젠장.... 정말이지 나의 심장은 때론 너무나 잔인해. 이리저리 피해가는 카이의 은어같은 다 리를 잡고, 그것을 들어올려 허벅지를 질끈 물어버리자, 카이가 아윽- 하는 신음성을 냈다. 금세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자, 나는 들고 있던 다리를 슬그머니 벌리며 자리를 잡았다. 그리 고 훌쩍이는 그의 눈가를 살짝 핥았다. " ...울지마라, 네가 울면 나역시 울고 싶어지거든-아까, 그건 그냥 일기야. 너와 나의 신혼에 대 해서 써나가고 있는거야. 알았지..? 그러니까 이제 그만... 쉿, 그래. " 흑흑대는 그의 눈물맛이 짜고 쓰다. 손에 감기는 긴 머리칼을 조심스레 놓고, 그의 얼굴 곳곳에 가볍게 키스를 뿌리다가 부드럽게 입술을 겹쳐 오니, 처음엔 집요하게 열지 않던 박꽃같은 치아 를 결국 함락한다. 안쪽을 깊게 훑어 내려가다가 혀를 겹치고, 헐떡이는 그의 숨을 조심스레 유 도하다가 다시 파고들어버린다. 어느새 울음을 그치고 서로의 입을 탐닉하는데 빠져있는 카이 를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슬슬 달아오르기 시작한 그의 몸에 화인을 새기기 시작했다. 깊게 파고들고, 헐떡이는 사랑하는 이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다시 몸을 뺀다. 자그맣게 싫 어, 엘리.. 어서- 라는 그의 말이 얼마나 자극적인지 카이는 알까.. 미친 듯이 그의 몸에 자국을 새기고, 나를 각인시켜나간다. 따뜻하게 나를 품는 아이의 안은 세상의 그 어떤 미약보다 더 달 콤하고, 그래서 나는 이 행위를 멈출수가 없다. 사랑해, 라고 작게 속삭이니 으응.. 이라 말해주 는 나의 어린 신부여. 아아, 대체 어떤 신이 이런 극상의 쾌락을 만들어 냈단 말인가- 격렬해져가는 행위와 함께, 나는 내 소중한 자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부디 알아다오, 너라는 존재에 모든 것을 걸어버린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설령 이 세상이 지 옥이 되어 너와 내가 떨어진다 해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나를 기다려달라.. 내 생명, 나의 심 장, 삶의 이유여. 내 그동안 너 없이 어찌 살아왔단 말인가... " 흐윽- 응, 앗-!" 어둠속, 희미한 달빛 아래 드러난 그의 나신과 쾌락에 들뜬 표정이 미치도록 애잔하고 아름다워 나는 그렇게 또다시 그에 대한 사랑을 깨닫게 된다. 사랑해, 사랑한다. 이 세상 무엇보다도 , 심 지어 나 자신보다 더 ... " ...사랑하고 있다, 너만을.." 깊어가는 밤, 차게 빛나는 달빛보다 아름다운 너에게 잊혀지지 않을 각인을 안겨 주리니. 그것은 나의 사랑, 그것은 나의 갈망, 그리고 절망... 그러니 신이여- 부디 이 기도를 들으사, 나와 그에게 영원함을 약조해 주소서. 영원히, 영원히.. 그리하신다면 제 남은 모든 일생을, 그와 당신을 위해 바치겠나이다.... -엘리의 신혼 일기, 마침-